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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이야기

올해도 어김없이 연장을 알리기 위한 글을 남깁니다.

매년 들어와 보는 것도 귀찮아서(실은 이제 여유가 좀 되서)
다년 결제를 해놓아서 이제 1년에 한 번도 안와보겠네요.

댓글도 막아 놓았습니다.
2,000개가 넘는 댓글을 스팸처리했는데,
여전히 남아있는 1,200개의 댓글을 보면서 이게 뭐하는 건가 싶네요.
2,000개 중 진성 댓글이 하나도 없는걸 보면 괜찮을 듯 싶습니다.
그래도 진성 댓글이 있을거 같기도 해서 해외 접속이나 댓글을 막지 않았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이제 막습니다.

의외로 꾸준히 히트가 기록되는 사이트라는게 너무 의외인데…
일 평균 5회는 넘어갈듯 합니다.
도매인명을 잘지은 건가??

그래도 한 자락 추억이니까,
잘 남아있어서 다행이에요.
(마치 싸이월드 방명록 보는듯?)

2020년의 어느날 2014년의 수업 하나를 회상하며

이 과제를 한지도 벌써 6년이나 됐군요. 2014년 수업이었으니까요.
교수님이 걱정하셨지만 6년이나 유지했으니 꽤나 잘했다고 자평하고 싶어요!

2014년이면 기획자로 한창 활동할 무렵이네요.
스스로 가장 성장했던 시기였기에 그립기도 합니다.
이 사이트는 기획자가 아니라 개발자로 처음만들었던 사이트였어요.
어쩌면 이 과제 덕에 야매개발자로 활동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지금 이 수업을 들었다면,
유튜브로 콘텐츠를 만들거 같아요.
콘텐츠의 시대가 오리라 예상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떤 기획자가 될까를 고민하던 시기에
만들었던 사이트에요.

오늘 이렇게 새로운 글을 쓰는건,
지금 다시 기획자로 돌아가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2014년 어떤 기획자가 될지 고민하던 시절로 돌아가,
야매 개발자가 아니라 기획자라는 타이틀로 돌아가려고해요.
그런 생각을 가지니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만든 사이트를 되돌아 보게 되네요.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사이트입니다만,
좋은 기획자가 되기위해, 개발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사이트인지라 애착이 갑니다.

한편으로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혹시 덧글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스펨도 싹 정리해봤는데,
특별히 추가된 덧글은 없군요.
모두, 괜찮은 삶을 살고 있길!

힐링은 미봉책

 

오랜만에 포스팅이네요. 사실 어제부터 개인 블로그를 만들어 포스팅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포스팅 내용에 ‘괜찮다’라는 말이 자주 들어가서 갑자기 생각이 났네요 ㅎㅎㅎ 본 블로그의 주제와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그동안 업데이트가 없었으니 똑같은 내용으로 포스팅합니다. 우리 모두 괜찮아요~

힐링은 미봉책

힐링은 퉁치는 개념이에요. 진단을 해야 하는데 정확하게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미봉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외과의사가 수술하다가 ‘아, 이건 지금 자르면 안 되겠다, 복잡하다.’ 해서 다시 덮는 경우가 있어요. 힐링은 그런 것 같아요. 메스를 들이 대려면 정확하게 진단해서 뭘 잘라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힐링은 진단도 하지 않고 수술도 안 받겠다라는 얘기거든요. 대충 한 번 가보겠다 라는 얘긴데, 비겁한 담론이죠. 힐링의 수사학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네 마음만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뭐가 달라 보여요? 착각이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나서 내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이런 절차들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꾸 힐링을 하게 되게 되면 힘 있는 사람이나 권력자들은 좋아할 거예요. 노예가 피라미드 쌓다가 힘드니까 돌 옆에 앉아서 “이 일이 내 무덤은 아니지만 가치 있는 일이야. 유네스코에 등재될 건물을 올리는 것이야.” 이러고 있어요. 그게 힐링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힐링이죠? 힐링일 수 없어요. 문제를 외면하고 도피하는 거죠. 사람들이 힐링에 빠져드는 것은 편하기 때문이에요. 힐링이 가지고 있는 담론들은 무기력함, 약간의 집중력 없는 상태, 맹한 상태를 유지하죠.
뭐든지 문제가 있으면 냉정하게 진단하고 문제가 어디서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고, 해결을 해야죠. 용기가 있으면 고칠 것이고 용기가 없으면 방치하는 거예요. “당신 상황이 이렇다. 해결책은 이거다. 책임은 당신이 진다.” 이렇게 사람들을 떠 안아야 되는데, 힐링은 “괜찮아요” 하고 넘어가요. 저는 상담하려는 분에게 본인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여기가 뛰어내리는 곳이다. 여기서 뛰어 내려라.”고 말해요. 그런데 못 뛰고 뒤로 물러나면 “너 물러났다. 너 비겁한 걸 알아라.” 고 말해요. 오히려 자신이 비겁한 걸 알고 살아가면 괜찮아요. 왜냐하면 계속 비겁하게 살면 자신한테 화가 나서 언젠가는 용기를 내요.

그런데 힐링은 ‘여기서 뛰면 뭐해? 어차피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지각 변동으로 지층이 올라 올 텐데’ 하는 식이죠. 힘이 없게 만들고, 결단을 어디서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게 만들죠. 그런 것이 편하니까 비겁을 은폐하기도 좋죠. 직접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개입할 필요도 없고요. 힐링은 우리가 19세기 이후에 인문학적으로 성취한 것에 비해서 너무 낙후된 개념이죠. 그런데도 그게 먹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비겁해졌다는 거고, 무기력해졌다는 거를 반영하는 거 같아서 씁쓸하죠. 힐링 중에 또 하나의 메커니즘이 누구를 용서하는 담론이에요. 그런데 용서는 강한 자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약한 자가 용서를 하면 포기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약한 자들이 용서해요. 용서나 화해는 굉장히 강해졌을 때,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거에요. 지금은 약자들이 힐링을 해요. 위험하죠. 많이 위험한 담론이에요.

-네이버 캐스트, 철학자 강신주의 서재

한민국 사회는

너무 쉽게 ‘괜찮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얼마나 피폐한 사회인지 잘 알기 때문에 ‘괜찮다’는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인지 저도 잘 알고 있고, 그 말에 기대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괜찮다’라는 말은 노력의 끝에 들어야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신주 박사의 말처럼 벼랑 끝에 몰려서 뛰어내려야 하는 순간도 있죠. 뛰어내리기 전까지는 비겁한거 맞아요. 타계할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벼랑에서 뛰어내려도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하냐구요? 또 벼랑 끝으로가서 또 뛰어내려야 하죠. 그럴 때 다시 뛰어내려도 ‘괜찮다’가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뛰어내려보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자꾸 비유적인 표현을 하네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까요? 꿈에 도전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말해요. 어차피 실패할 것이니 뛰어내리지말고 상처입지말고 포기하라고. 꿈에 도전하는 것이 벼랑에서 뛰어내려보는 것이에요. 뛰어내려도 실패하면 또 뛰어내려야 하는거죠. 성공 확률이 낮으면 그만큼 많은 시도를 하는 방법 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꿈이 없어도 괜찮다, 방황해도 괜찮다라고 말해요. 이건 비겁한거라 생각해요. 꿈이 없어도 괜찮고 방황해도 괜찮은건 그만큼 치열해야해요. 꿈이 없다는 사실에, 방황한다는 사실에 아파야 괜찮은거지, 괜찮다는 말을 믿고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죠. 우리가 괜찮다고 말해야할 것은 또 상처입어도 괜찮다는 의미지 지금 상태가 괜찮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힐링캠프에서 강신주 박사가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유튜브에서 못찾았네요. 사실, 잔인한 이야기죠. 실패한 사람에게 또 실패하고 또 실패하라고 권유하는 것은요.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강신주 박사의 이야기를 불편해해요. 하지만, 힐링이 만연한 시대에 한편으로 생각해봐야할 부분 아닐까요?

하지만 한편으로 강신주 박사가 간과하고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비겁한 자신에게 화가 나지 않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것도 하나의 용기일지도 몰라요. 또 분노를 바탕으로 움직이면 정작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를 잊게되기도 해요. (결국 오늘도 아무 도움도 안되는 포스팅으로 마무리될거 같은 불길한 기분…)

어찌됐든 사실 저도 오늘 ‘괜찮다’라는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사실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스럽거든요. 강신주 박사의 말처럼 현실을 은폐하려는 꿈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누군가 저에게 지금 그 길을 걸어도 ‘괜찮다’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조금 비겁해보여도 이렇게 마무리할게요.

괜찮아요!

현실이 어쨌든,

당신은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니까요!

-Fin

영웅론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포스팅입니다.

개강도 했고 오늘은 추석의 마지막 연휴입니다. (울고싶다…) 풍성한 한가위 되셨나 모르겠네요!

…라고 써놓고 일주일이 넘게 방치했습니다.

처음의 춘향은 사랑이라는 이상을 믿은 영웅입니다 로 밑밥을 던지고 시작했으나 결국 영웅에 대한 이중적 태도 때문에 더이상 포스트를 작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영웅의 문제점을 그토록 꼬집으면서도 우리는 왜 영웅의 출현을 바라는가? 라는 문제 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춘향은 사랑이라는 이상을 믿은 영웅입니다’는 춘향가를 연출한 안드레이 서반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절망과 냉소주의, 회의주의에 빠진 시대를 살고 있어요.

이상도 없고, 영웅도 없는 시대죠.

<춘향가>는 사랑이라는 이상을 믿은 영웅 이야기입니다.

춘향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

안드레이 서반은 춘향가의 결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몽룡이 돌아와 춘향을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춘향에게서 사랑의 승리를 보고 있습니다. 춘향이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데아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지 이몽룡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 해석은 정말로 그럴듯하게 느껴집니다. (저만 그런가요?)사실, 이몽룡은 정말로 ㅡ 찌질한 남자니까요. 과연 이몽룡이 춘향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점은 끝까지 의문입니다.

비록 춘향을 ‘기생’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바라봤기에 춘향의 사랑을 받은 것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은 아닌거 같으니까요. 어쩌면 춘향이의 반 강요ㅡ 에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죠. (그러고보니 춘향이 완전 여우네?)

안드레이 서반은 춘향이와 햄릿같은 인물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이상이 될 수 있는 인물, 희극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말하죠.

그의 견해는 현대사회에 시사점이 분명합니다. 이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걸 바칠 수 있는 인간… 결과나 업적과는 무관하게 이상을 위해 사는 삶은 충분히 영웅적이라 할만 합니다.

그러나 앞선 포스트들에서 영웅의 한계에 관해 논했습니다. 영웅 혼자서 사회를 바꿔놓을 수는 없으며, 그것이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영웅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정답은 진부하고 간단합니다.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되어야 하죠. 그러나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영웅을 바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걸까요? 영웅의 삶과 업적을 논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 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작성하려던 포스트와는 백만광년쯤 멀어져 있고, 사실 아직 저도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한 문제라 포스트가 엉성하군요. 조금 더 지나면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될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의견에는 항상 자신의 입장이 포함되는 법이라 아직 제 입장이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명료한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겠죠. 사실 입장보단 현실을 보는게 더 빠를…

제 입장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또다른 포스트를 작성하기로 하겠습니다. 더이상 방치했다간 아예 없었던 일이 될까 써보았습니다만 부족함만 확인했네요.

부족하고 모자란 포스트지만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다음에는 더 맛깔난 포스트를 작성하길 바라며!

P.s 필력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흐뀨흐뀨 OTL 보는 사람도 없지만 참 읽는 맛 없는 포스트네요…

D등급 그녀

과제가 끝났어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했는데 잘안되네요.
지난번에 <표백>도 그냥 인용만 해놓고 방치했고…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포스트 하나 쓸 시간이 없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귀찮은 거지만 이건 당신과 나만의 비밀로…

그래도 가끔 들어와서 인용문 하나라도 남길까해요.

사실 생각한걸 그대로 쓰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포스트로 작성하려니 또 많이 고민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고민하면서 쓰긴 좀 어렵다보니…

뭐 어쨌든, 오늘은 [D등급 그녀]라는 소설이에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옷에 얼룩이 묻었을 때, 그걸 제거하는 순서가 있어요.
대부분의 얼룩은 물로 지워요.”

“응.”

“그다음엔 세제를 이용해요. 약품도 있고……
그런데 그 순서가 말이에요.”

“응.”

“제일 잘 지워지는 방법이 첫 번째가 아니에요.”

“그래? 왜?”

“옷감에 손상을 주지 않는 게 첫 번째에요.”

“그래서?”

“인생도 똑같아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대처해야 하고,
반응해야 하고, 복수도 해야겠고, 성공도 해야겠지만요.”

“응.”

“원칙이 있어요. 무슨 일이든 결국엔 내가 첫 번째에요.
내가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요.”

“깊은 상처를 입어본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요.
얼마나 아픈지 아니까…….”

“뭐?”

“그리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줄도 알죠.”

진소라, [D등급 그녀] 중